4.19혁명 희생자를 추모하며… 한국적 민주주의 갈길은 아직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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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우리는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들어야만 했던 역사적인 날이다.

4.19혁명은 1960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평화로운 학생들이 주도한 봉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2023년은 4.19혁명 63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권위주의 통치가 종식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잊어서는 안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안심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한 결과입니다.

민주주의 항쟁을 이끈 사건, 핵심 인물의 역할, 언론의 영향, 혁명의 여파, 다른 역사적 혁명과의 비교, 한국 사회와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탄압

4.19혁명은 1948년부터 정권을 잡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진 결과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부패와 탄압, 언론 검열로 얼룩져 민주적 자유라는 것이 퇴색되어져 갔습니다.

결국,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인해 국민적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이승만은 독재권력으로 무기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신헌법이 공포되면서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권위주의적 정권의 몰락

4.19혁명은 학생, 지식인, 노동조합 등 다양한 집단이 권위주의 종식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한 공동의 노력이었습니다.

김종필 전 육군대위, 조병옥 전 언론인 등 핵심 인물들이 항쟁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4.19혁명이었씁니다.

당시 학생 지도자 김대중과 박정희도 시위대를 조직 결성하고 정부의 압박에 저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그 중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언론 검열의 통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정도로 신문 방송 등의 언론사를 압박하는 검열을 거쳤습니다.

이러한 언론 검열은 4.19혁명을 가져온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정부가 언론 지침을 내리고 그에 따라 검열 및 통제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대국민을 위한 알림 수단으로는 방송과 신문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커지자 언론은 더 가열찬 항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19 혁명, 국민 승리

4.19혁명의 여파는 곧 의회민주주의의 길을 놓게 되는 새정부의 수립이라는 결과는 가져왔습니다.

3권분립, 의회민주주의라는 것을 우리 국민이 인지하게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국민들은 어느때보다 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충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4.19 혁명으로 한국의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혁명의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성격을 가진 4.19 혁명은 평화적 시위의 선례를 만들었고, 미래의 민주화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희생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김주열 열사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데모사건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몇일 후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혀 상상조차할 수 없을 정도의 시신의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사망사건으로 인해 제2차 마산시위가 더 거세게 확산되어졌고, 부산과 대구 등 결국 4월에서야 서울까지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처참한 사망사건은 결국 전국적으로 퍼져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가리빵꾸의 정치깡패 동원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를 두고 4.18 의거로 불리기도 합니다.

4월 서울에 상륙한 이 부정부패와 그릇된 정권의 심판은 서울대 문리대학을 중심으로 대학 연합 시위가 계획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고려대생들의 평화적인 시위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대학생 시위대를 습격하기 위한 정치깡패를 동원해 다수의 부상자들이 발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에는 1명의 희생자(김왈영 열사, 고려대 화학과 학생)도 나오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는 복학을 준비하는 복학생이었고, 4월 19일 시위 학생들이 탄 차를 타고 당시 경무대 입구를 뚫기위해 시도하다 결국 목에 총상을 입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피로 얻은 혹독한 민주주의

이처럼 4.19혁명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파종되는 데 큰 업적을 남긴 암울한 사건입니다.

때문에, 그 어떤 문화보다 더 숭고하게 역사적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희생된 분들의 흔적과 넋을 기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적인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다른 국가에도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피로 물들어 얻은 혹독한 결과의 한국 민주주의는 이후 1980년 광주에서 선례를 남기게 되는 가슴 아픈 연속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4.19 혁명은 오늘의 전환점

4.19혁명은 권위주의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시작을 의미하는 대한민국 역사의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혁명의 발발 사건, 과정, 희생자들과 그들의 역할, 언론의 역할과 영향력, 그리고 이후의 지속적인 영감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지켜 나아가야 할 큰 가치입니다.

한국이 계속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못지않게 한국적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4.19혁명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19 Festival, 2023’

4.19혁명국민문화제가 주최하는 행사가 4월 18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전야제를 시작으로 ‘4.19 Festival, 2023’이 시작됩니다.

범정부 차원에서 지원받아 운영되는 이 행사는 자유, 민주, 정의의 역사인 4.19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전국민이 소통하는 화합의 장으로 마련되는 행사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감동과 희망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행사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